전주사고의 설치
조선 초 사고는 한양 춘추관의 내사고와 충주의 외사고 2곳이 있었는데. 충주 사고에 『실록』이 보관되었다. 『태조실록』은 1413년(태종13) 처음으로 편찬되었으며 이후 『정종실록』이 편찬되고 『태종실록』은 1413년(세종13)에 편찬되었다. 이 실록들은 모두 외사고인 충주사고에 보관되었으며 각 1본의 필사본이었다.
외사고인 충주사고가 내사고인 춘추관보다 더 안전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1437년(세종19) 사헌부에서 각 도의 명산에 『실록』을 여러 본 만들어 나누어 보관할 것에 대해 상소를 올렸고, 이 주장이 반영되어 동년에 새 사고를 전주와 성주에 설치하여 세 본은 충주, 전주, 성주에 한 본은 실록각에 보관하게 하였다. 성주와 전주에 새 사고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주는 고려시대 때 외사고가 있었던 해인사의 인접한 지역이였고, 전주는 태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조선왕조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새 사고를 성주와 전주에 설치하기로 결정한 후 모두 4질의 태조와 정종, 태종의 『실록』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충주사고의 『실록』을 3부씩 더 배낀 결과였다. 1445년에는 제작된 『실록』을 각각 1부씩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하기 시작하였다. 장서각이 이미 건립되어 있던 춘추관과 충주 성주에는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전주는 전주성내의 승의사(僧義寺)에 『실록』을 보관하다가 1464년(세조10) 가을에 진남루로 『실록』을 옮겼다. 이후 전주에 사고를 세울 것을 세조가 명하였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다가 1473년(성종4)에 이르러 사고를 경기전 동편에 건립하였다. 이때의 상황이 『동국여지승람』에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세조와 예종의 『실록』이 1472년 봄에 완성되자 전주에 동지춘추관사양성지를 보내 봉안하도록 지시하였다. 경기전 동쪽에 사고를 건립할 자리를 김지경(金之慶)이 양성지와 함께 정하자, 전주 부윤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정하고 인근 여러 포구에서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으로 징발하였다. 공사는 순창군수 김극련이 감독하였고 그 해 12월에 착수하였다. 다음 해인 1473년 5월에 실록각이 완공되어 그 해 8월부터 『실록』을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전주사고에는 총 60궤에 각종 문헌들이 담겨있었으며, 그 안에는 태조때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을 포함하여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 총 1,33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실록의 봉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주사고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을 포함하여 총 1,322책이 60개의 궤(실록 47궤, 기타 13궤)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고려사』 · 『고려사절요』 같은 국가의 주요 서적을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것은 화재나 전란 같은 유사시에도 역사가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는 국가 주요 사적을 보관하기 위해 서울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성주, 전주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각기 동일한 사적을 보관하였다.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전주사고본’이라 한다. 전주사고본 중 태조~태종 때까지의 실록은 필사본이며, 『세종실록』 이후에는 금속활자본이다.
이는 전주에 실록을 보관한 것이 춘추관이나 충주사고와 달리 1445년 이후로 1439년 사헌부가 충주사고는 민가들에 둘러싸여 있어 화재 등으로 소실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성주와 전주에 외사고 건립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1445년 실록이 전주에 봉안될 당시만 해도 전주사고가 건립되지는 않았다. 처음 봉안된 『태조실록』~『태종실록』은 전주 성내에 있는 승의사(僧義寺)에 보관되어 있다가 1464년 가을 전주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鎭南樓)로 옮겨졌다.
1472년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로 파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인근 포구의 선군(船軍) 300명이 역군으로 동원되어 그해 12월 착공한 뒤 이듬해 5월 공사를 마쳤다. 실록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8월에 선대 실록과 함께 봉안되었다. 이후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실록을 제대로 보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주사고에서는 사고 누각 위에 날아든 산비둘기를 잡으려 불을 들고 그물을 치다가 불이 나 실록이 모두 전소되기도 하였다. 보존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고 원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3년마다 포쇄를 시행하여 실록의 묵은 먼지를 털어냄과 아울러 사고에 보존된 실록이 훼손되거나 없어지지 않았는지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실록의 입 · 출입을 통제하고 사고 건물의 개 · 보수를 하는 등 사고 관리를 철저히 한 것은 국왕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없었던 실록의 역사적 위계 때문이었다.
역사를 지키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조선 역사를 수호함에 있어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한순간 200여년의 조선 역사와 고려시대 역사까지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위기의 전쟁이었다. 방방곡곡 네 곳에 나누어 보관하던 실록 중 전주사고에 보관한 실록을 제외한 세 곳의 실록이 일거에 소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전주사고 실록마저 없어져버렸다면 한국 역사에서 기억에 의존하는 시대가 수백 년은 상회했을 것이다.
전주사고 활용현황
1445년(세종 27)에 실록을 2부 더 배껴 만들어, 각 1부씩 전주, 성주에 사고를 새로 건립하여 보관하였다.
1597년 실록각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는데 1696년(숙종 22) 별전을 소실된 실록각 자리에 건립하고, 1937년 별전이 철거되자 그 자리에 1963년 전주시립박물관을 건설하였다.
이후 1990년 박물관 건물을 철거하고 실록각터를 발굴하여 1991년 전주사고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전주사고는 현재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다. 사고 내부에서는 상설전시가 운영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와 조선사고의 변찬사 그리고 전주사고와 관련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해설사는 별도로 두지 않고 있다.
사고 내부의 전시품들로써 영인본인 조선왕조도서들을 활용하고 있으며, 패널설명 및 모형 등이 전시의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왕조도서의 제작방법, 보존방법, 사고의 변천 등에 대한 내용 역시 전시하고 있다. 전시의 단점이라면 사고 내부가 매우 좁아 다수의 사람들이 관람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포쇄재현 행사
포쇄(曝曬)란 충해를 막을 수 있도록 습기를 제거하여 책을 말리는 것으로, 전국 최초로 전주시에서는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를 실시하였다.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 포쇄재현은 19세기를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현존자료인 박정향의 ‘박학사포쇄일기’를 기반으로
포쇄재현이 진행되었는데 전주사고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전기이나 그 당시 포쇄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는 탓에 조선후기 기록을 활용하게 되었다. 박정향은 1871년(고종 8) 적상산사고와 태백산사고 포쇄를 수행한 자로 별검춘추(別檢春秋)라는 직을 맡았다. 그는 포쇄사관 선임, 사관일행 구성, 포쇄인원 및 장소, 소요물품, 절차 및 방법 등에 대해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포쇄하면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전문가 고증회의를 거쳐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은 전주사고 일대의 오목대, 태조로, 경기전에서 진행된다. 3년에 1차례씩 조선시대 외사고(外史庫)에서 진행된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말리는 행사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중앙에서 직접 사관을 파견하여 실시하였다. 국왕조차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으나 포쇄를 하면서 사관들은 자연스럽게 실록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내용을 보았다 하더라도 이를 발설해서는 안됐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글을 모르는 사람을 실록을 포쇄할 때는 동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길놀이 형식의 사관행렬을 오목대에서 태조로를 따라 경기전 앞까지 진행하고, 조선왕조실록 포쇄를 경기전 전주사고 앞에서 재현한다. 포쇄절차는 우선, 전주사고 앞에서 사관들이 4배를 한 후 사고 안에 들어가 실록궤를 점검하고, 교생들로 하여금 실록궤를 사고 밖으로 가지고 오게 한다. 그 다음, 실록궤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꺼내어 건조시키고, 건조작업이 끝나면 실록궤에 천궁 및 창포가루를 넣고 실록을 초주지 및 붉은색 보자기로 싸고 다시 실록궤에 봉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실록궤에 봉한 후에는 수결(手決)한 종이를 사관이 밀봉하고, 실록궤를 사고에 넣는다. 그 후에는 조선왕조실록 포쇄 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적는데, 이것을 형지안(形止案)이라 이른다. 형지안 작성까지 모두 마치게 되면 마지막으로 전주사고 앞에서 다시 4배를 하며 조선왕조실록 포쇄를 마무리한다.
전국 최초로 진행되는 조선왕조실록 포쇄행사는 역사기록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것을 직접 재현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실록의 보존 대책 수립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파죽지세로 쳐올라오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전라감사 이광(李洸), 전주부윤 권수(權燧) 등과 함께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셔져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용(御容)과 『조선왕조실록』을 옮길 대책을 논의하였다.
처음에는 충주사고 · 성주사고와 같이 땅에 묻으려 했으나, 방어사 곽영으로부터 경상도 금산현에서 잡힌 왜적에게 성주사고에서 약탈한 실록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방법을 바꾸어 깊은 산중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하여 참봉 오희길은 무사 김홍무(金弘武), 수복 한춘(韓春)과 함께 밤낮으로 은닉처를 찾아다니다가 정읍 내장산으로 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수호
그해 6월 왜군이 전주로 통하는 관문인 금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치와 이치에서 대접전을 전개하게 되자 전주성이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라감사 이광은 실록과 어용을 은닉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태인의 선비 손홍록(孫弘祿) · 안의(安義)가 가솔들을 데리고 경기전으로 급히 달려왔다. 당시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의 노구였다. 6월 하순경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유인(柳訒), 안의, 손홍록, 김홍무, 한춘, 등이 어용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고, 7월경 실록을 은적암(隱寂庵)을 거쳐 더 깊숙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9월에는 어용을 비래암에 모셔 함께 지키었다.
내장산에서 수직 책임자는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이었다. 이들과 함께 영은사(현 내장사) 승려 희묵(熙默)과 무사 김홍무 등 의병 100여 명이 이를 지켰다. 실록과 태조어진이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으로 옮겨졌지만, 이를 지키는 관리들과 선비, 승려들은 실록과 어진을 최종 보관한 비래암뿐만 아니라 용굴암 등을 비롯한 주변에 흩어져 요새를 구축하고 혹시라도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왜군을 경계하였다.
내장선에 실록이 임시 보관된 기간은 실록을 옮긴 1592년 6월 22일부터 1593년 7월 9일 아산으로 출발할 때까지 총 1년 18일 동안이었다. 실록과 어진을 지키는 일은 손홍록과 안의 등이 주로 담당하였다. 『수직상체일기』에 의하면 손홍록과 안의가 함께 수직한 날은 53일 이였으며, 각각 홀로 지킨 것은 안의 174일, 손홍록 143일이었다. 두 사람이 내장산에서 실록을 지킨날은 370일에 달한다.
한편,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유인은 실록을 옮긴 후 전주를 오가면서 실록을 지켰다. 왜군이 웅치를 넘어 전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장산의 수직을 손홍록과 안의에게 맡기고 전주를 왕래하면서 전라감사의 지휘를 받아 실록 보존을 위한 동향을 살피었던 듯하다. 오희길은 10월 28일 집으로 돌아갔으며, 그의 뒤를 이어 경기전 참봉이 된 유인은 11월 12일 내장산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실록과 어진을 보존하는 것은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일일 뿐 아니라 조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0일 좌랑 신흠이 내장산 수직처를 방문하여 실록과 어진을 살펴보았으며, 1593년 5월 28일에는 봉교 조존성이 선릉(宣陵)과 전릉(靖陵) 두 능침(陵寢)을 개장할 때 필요한 지석(誌石)과 옥책(玉冊)을 등서하기 위해 실록 수직처에 내려와 실록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26) 전주성이 함락된 후, 7월 9일 실록과 어용은 정읍 내장산에서 아산으로 옮겨졌다. 이때에도 안의와 손홍록은 식량과 말을 마련하여 수행하였다. 그 후 어용은 아산에 모셔두고, 실록은 다시 해주로 옮겼다. 1595년 실록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어용 역시 강화도로 옮겨 모셨다. 안의는 이때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사망하였다. 1597년 실록과 어용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었다.
손홍록, 김홍무, 한춘, 사복(寺僕), 강수(姜守), 박야금(朴也金), 김순복(金順卜) 등은 전주에서 묘향산으로 실록과 어용이 옮겨지는 5~6년 기간 동안 줄곧 배행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선조36) 강화도로 옮겨졌다.
역사를 지킨 사람들
윤길은 문과에 선조 22년(1589)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례찰방으로서 최철견, 오희길, 유인, 손홍록, 안의, 김홍무 등과 힘을 합쳐 정읍 내장산으로 태조 어용과 실록 · 제기를 옮겼다. 그런 후에 승과 재인을 100여 명 뽑아 각종 병기들을 모아 내장산을 수호하게 함으로써, 실록을 전화로부터 지켰다. 후에 무주 현감 직을 받아 군대를 지휘하고 식량을 보급하였고, 도원수 권율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오희길은 후릉 참봉을 거쳐 경기전 참봉에 선조 24년(1591)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 태조 어용과 실록을 수호할만한 도내의 산들을 물색하다가, 내장산의 용굴암이 마땅한 곳임을 알게 되었고 조선군이 웅치 전투에서 패하자 태조 어용과 실록을 용굴암으로 이안하였다.
그런 후에는 김홍무 등 3인과 승 회묵, 산척 등 100여 명을 모아 용굴암을 수비하게 함으로써 전화로부터 실록을 보호하였다.
안의는 임진왜란 때 손홍록과 함께 의곡 계운장이 되어 백미와 목화 등을 수집하는 일을 하였고 행재소와 의장 민여운의 진중에 자신의 쌀과 면화를 내어주었다. 또 손홍록과 함께 어용과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이를 수호 하였다.
선조 26년(1593) 7월에 어용과 실록을 행궁에 옮겨 봉하라는 명이 있자, 이를 손홍록과 함께 충청도 아산현관에 안전하게 옮겼고, 곧바로 행재소로 이동하여 중흥 6책을 올렸다. 충청도 검찰사 이산보가 그의 공을 선조에게 아뢰어 안의는 별제의 벼슬을 받게 되었다.
손홍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적이 전주까지 도달할 위기에 처하자, 오희길은 태조 어용을 이안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손홍록은 안의와 함께 전주로 들어와 내장산에 태조 어용과 제기 · 실록을 이안하고, 무인 김홍무 · 승 희묵 · 가동 등과 함께 내장산의 요충지를 굳게 지켰다. 선조 26년(1593) 7월에 어용과 실록을 행궁에 옮겨 봉하라는 명이 있자, 이를 안의와 함께 충청도 아산현관에 안전하게 옮겼고, 곧바로 행재소로 이동하여 중흥 6책을 올렸다. 충청도 검찰사 이산보가 그의 공을 선조에게 아뢰어 손홍록은 별제의 벼슬을 받게 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병신년(선조 29년, 1596)에는 다시 아산에 가서 강화부로 어용을 옮겼고, 정유년(1597)에는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로 다시 어용을 이안하였다.
구정려는 사마시에 일찍이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는 실록과 어용을 오희길 · 손홍적 · 안의 등과 함께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하였다.
선조 25년(1592) 11월에 진전 참봉이 되어 내장산 용굴암을 수호하였으며, 선조 26년(1593) 7월에는 정부의 명에 따라 어용을 아산에까지 옮겼다.
의승장 희묵은 임진년(선조 25년,1592)에 왜란이 발발하자 어용을 내장산으로 이안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의병장으로서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전하게 이안 할 수 있게끔 호위하였으며, 계사년(1593) 7월에 아산으로 어용을 이안할 때에도 따르며 호위하였다.
역사를 지킨 기록
이안관련 자원은 실질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옮기는 과정에 해당하는 역사문화자원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자원은 전주사고에서 정읍으로 실록을 옮긴 뒤 선조에게 바칠 때까지의 기록을 일지 형태로 작성한 『수직상체일기』이다.
『수직상체일기』는 누가 작성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실록을 피안시켰던 손홍록과 안의가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료의 표지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라 후손이 후기해 놓았으나 속지에는 『임계기사(壬癸記事)』와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사료는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으로 옮길 때부터 국왕에게 바칠 때까지의 기록이 일자별로 간단하게 쓰여 있다. 뒤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올린 시무시책과 이산보와 유탁의 포상을 요청하는 장계, 의병진에 보낸 의곡 등의 물목과 의곡을 모으기 위한 통문 등의 부기되어 있다.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도 실록 이안에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 놓은 자료는 『봉안어용실록사적(奉安御容實錄史蹟)』(宣廟實錄 抄出), 『寒溪 孫先生 行狀』(양응수찬), 『여지도서』 보유편 전라도 정읍고적 용굴암, 『탐진안씨 족보』, 『난중잡록(亂中雜錄)』, 『이제유고(頤齊遺藁)』 권 23, 傳,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진전호종제공사실(眞殿扈從諸公事實) 등이 있다.
실록 복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은 유일본이 되어버렸다. 조선에서는 전쟁기간 중에 필사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등 필사적인 역사 수호에 나섰다. 그렇지만 그 양이 방대해서 필사본을 만들어 각 지역에 나누어 보관하는 것은 중대하고 힘든 일이었다.
당시 춘추관의 분석에 의하면, 총 577책의 글줄과 글자수를 계산할 때 글씨를 잘 쓰면서도 빨리 쓰는 사람이더라도 20명이 필사 할 경우 한 달에 30책을 필사할 수 있으니 2년이 지나야 겨우 1질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겸 춘추로서는 2년에 1질을 끝내기 어려우며 3년은 걸릴 것이라고 계산이 나왔다. 결국, 실록을 필사하려는 계획을 중지하고, 신구활자를 보충해서 인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병조(兵曹)를 인출하는 곳으로 결정하고, 선조 36년 5월경에 실록을 묘향산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순차적으로 간행에 들어가 선조 36년 7월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선조 39년 4월 실록의 교정과 세보가 끝나게 되었다. 새롭게 제작된 『조선왕조실록』은 총 239책(13대 804권)이었다. 전주사고본이 576책인데,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새로 만드는 것은 4~5권을 1책으로 묶거나 2~3권을 1책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전체 사고가 다섯 곳 (춘추관, 정족산사고,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이었지만, 새로 간행된 『태조실록』~『명종실록』은 완성본 3부를 만들고, 거기에 교정본 1부를 더하여 전주사고본과 함께 다섯 곳의 사고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였다. 전주사고본은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었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실록과 합하여 ‘정족산성사고본 실록’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록을 복간한 400년 뒤인 2007년 전주시에서는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614책을 포함해 태백산 사고에 보관한 조선 후기 실록(선조~철종) 복본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복본화 사업이란 내용 전달 중심의 영인(影印) 인쇄가 아니라 기록 종이 자체의 물성을 재현하고, 현대 천담 인쇄기술을 접목하여 원본과의 동질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1606년 전주사고본을 복인(復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사업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복본을 제작하는 이 사업이 완료되면 『조선왕조실록』 전체 복본이 실록을 지켜낸 전주에 보존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수호의 의의
한국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4개(춘추관(春秋館) 사고 · 충주(忠州)사고 · 전주(全州)사고 · 성주(星主)사고가 존재했다. 사고에는 조선 초의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사고를 4개를 두어 분장한 이유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국가보다도 중요한 역사’를 지키기 위함 이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고가 소실될 위험이 현실로 다가왔다.
4개의 사고에 실록을 분장(分藏)한 것은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춘추관 · 충주 · 성주지역에 봉안하였던 실록들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도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수호됨으로써, 현재 한국인은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한국인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방대한 역사기록을 보유한 문화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